80년대에 청소년기를 거친 남자들이라면 버버리 코트와 이쑤시개, 그리고 쌍권총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다.
한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버버리 코트를 입고 폼을 잡았고, 입 천장을 홀랑 데이면서도 라이터의 불꽃을 입으로 빨아들였으며, 월남전에서 아버지가 썼음직한 얼굴 반을 가리는 라이방(선글래스의 은어)을 쓴 채 거리를 활보했던 추억은 모두 홍콩 누아르 때문이었다. 주윤발 장국영 류덕화 등 홍콩 누아르의 주인공들은 그 시절 중고등학생들의 영원한 형님이었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사생결단'(감독 최호ㆍ제작 MK픽쳐스)은 마약과 섹스, 살인과 폭력의 틈 바구니 속에서 배신과 협작을 일삼는 온갖 인간 군상들이 부산 구석구석을 핥는 듯 돌아다니는 내용이다.
최 호 감독은 '사생결단'이 일본 야쿠자 영화의 걸작인 '인의없는 전쟁'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다. 2차 대전 후 야쿠자들이 양육강식 속에서 생존하려 애썼듯 IMF를 배경으로 생존 욕구가 들끓는 인물들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적극적인 줌의 활용, 긴지 앵글이라 불렸던 수평틀기 등 촬영기법과 황정민의 의상까지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인의없는 전쟁' 시리즈의 향내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아는 사람에게만 경전으로 존재하는 '인의없는 전쟁'보단 검디 검은 부산 밤바다가 홍콩의 칠흙같은 밤바다를 연상시키듯 '사생결단'은 홍콩 누아르에 비견하는 게 올바른 관전법일 것 같다.
때는 IMF 직후. 곳은 부산. 부산 연산동을 '나와바리'로 두고 있는 마약 중간 판매상 이상도(류승범)는 '뽕쟁이'를 뜯어먹고 사는 '짭새' 도진광 경장(황정민)에게 약점이 잡혀 마약범을 잡기 위한 함정수사에 협조한다.
도 진광 경장은 친형 같은 경찰 선배를 죽인 마약상 장철(이도경)을 잡는 것만이 자신을 나락에서 구원해주리라 믿는다. 그런 도 경장에게 정보를 주는 조건으로 점차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이상도는 장절과 도 경장, 두 사람의 뒷통수를 모두 때릴 준비를 한다. 하지만 모든 군상들이 얽히고 �鰕� 먹이사슬은 이상도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낳게 한다.
황정민과 류승범, 두 배우는 칙칙한 어둠이 드리운 '사생결단'에 더욱 음영을 드리운다. 선배의 복수를 한다면서 뻔뻔하게 선배의 부인을 안는 도 경장은 '달콤한 인생'의 백 선생과는 또 다른 악역이다. 백 선생이 날 선 일본도였다면 도 경장은 생선 내장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사시미 칼 같은 느낌이다.
"부산 사람이 아니니깐 사투리를 어느 정도 구사했는지 모르겠다. 노력한 만큼 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는 류승범은 왜 '사생결단'에 류승범이 필요했는지를 영화 속에서 확인케 한다.
마약 중독자로 출연한 추자현은 영화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으며, 이상도의 삼촌으로 등장하는 원로배우 김희라는 회한어린 삶을 영화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선명히 드러낸다.
부산대교, 초량 텍사스촌, 남전동 달동네, 대동수문 앞 해변 도로, 용호동의 폐공장, 감천항 등 '사생결단'에 오롯히 담긴 부산의 곳곳은 홍콩 누아르에서 홍콩이 불야성으로 영화에 존재감을 드리우듯 영화에 제 3의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사생결단'은 과격한 묘사가 데이트 무비로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홍콩 누아르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영화이다. 18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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